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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멀티버스, 그 속에서 나를 찾는다

by 영화심리 2026. 1. 18.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멀티버스(다중우주)라는 화려한 포장지를 두르고 있지만, 그 포장지를 뜯어보면 지독하게 현실적인 '나'와 '가족'의 이야기가 튀어나옵니다. 겉보기엔 B급 감성의 액션과 기괴한 유머가 난무하는 정신없는 영화처럼 보이죠. 하지만 관객들이 이 영화에 열광하며 눈물을 쏟은 이유는 핫도그 손가락이나 말하는 돌멩이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그 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주인공이,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내 인생이 더 나았을까?"라는 지독한 후회와 만성적인 피로에 시달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과 꼭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쏟아지는 정보와 무한한 선택지 속에서 오히려 길을 잃고 방황하곤 합니다. 이 영화는 그런 현대인의 정체성 혼란과 심리적 붕괴를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시각화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영화의 줄거리를 따라가며,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무너진 자아가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지 심리학적 관점에서 깊이 있게 들여다보려 합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포스터

모든 것이 동시에 밀려오는 '인지적 과부하'의 현장

영화 초반, 주인공 에블린이 처한 상황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입니다. 국세청의 세무조사는 목을 조여오고, 운영 중인 세탁소에는 까다로운 손님들이 들이닥칩니다. 남편 웨이먼드는 이혼 서류를 내밀 타이밍만 보고 있고, 딸 조이와의 관계는 살얼음판 같습니다. 이 모든 일이 '동시(All at Once)'에 터지는 상황, 영화는 이를 정신없는 편집으로 보여주지만, 이는 현대인이 일상적으로 겪는 심리적 상태인 '인지적 과부하(Cognitive Overload)'를 완벽하게 은유합니다.

 

인지적 과부하란, 인간의 뇌가 처리할 수 있는 정보와 감정의 용량을 초과해 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마치 컴퓨터에 너무 많은 창을 띄워놓으면 버벅거리다 멈춰버리는 것처럼 말이죠. 에블린은 "나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무력감에 젖어 있습니다. 이때 영화적 장치인 '멀티버스'가 등장합니다. 쿵푸 고수가 된 에블린, 화려한 배우가 된 에블린 등 수많은 다중우주의 모습들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에블린이 힘겨운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을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떠올렸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자 "비교를 통한 자아 검열"의 시각적 형상화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현재의 나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만약에(What if)'라는 가정에 집착하는 것은 현실 도피 기제이자 불안의 증거입니다. 에블린의 뇌는 지금 눈앞의 영수증이 아니라, '실패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또 다른 나'를 끊임없이 상상하며 현재의 자아를 갉아먹고 있었던 셈입니다. 멀티버스는 결국, 수천 갈래로 찢어진 그녀의 복잡하고 시끄러운 마음속 풍경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베이글이 보여주는 공허함, 자아 분열과 허무주의

영화 속 빌런이자 딸인 조이(조부 투키)는 모든 멀티버스를 경험하고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도달한 결론은 신과 같은 깨달음이 아니라,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칠흑 같은 허무주의입니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것을 올려놓은 '검은 베이글'을 만들어 세상을 삼키려 합니다. 이 검은 베이글은 속이 텅 빈 도넛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는 과잉된 정보와 의미 속에서 오히려 길을 잃어버린 젊은 세대의 공허한 내면을 상징합니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조이의 이러한 태도는 지속적으로 이해받지 못한 자아가 만들어낸 극단적인 방어 기제입니다. 자아 형성기에 부모로부터 있는 그대로 수용받지 못하고 끊임없이 기대와 실망 사이를 오갈 때, 개인은 "어차피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무기력감, 즉 학습된 무기력에 빠지게 됩니다. 조부 투키의 파괴적인 행동은 세상을 멸망시키고 싶은 악의가 아닙니다. "제발 나를 봐달라, 내 고통을 이해해 달라"는 처절한 구조 신호이자, 동시에 그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는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싶은 자살 충동과 맞닿아 있습니다.

 

에블린과 조이는 사실 거울처럼 닮아 있습니다. 엄마인 에블린은 혼란을 견디지 못해 분노와 짜증으로 자신을 분열시키고 있고, 딸인 조이는 그 혼란에 압도되어 냉소와 차가운 무관심으로 자신을 숨겨버린 것이죠. 영화는 이 모녀의 대립을 통해 자아의 붕괴가 '폭발(에블린)'하거나 '수축(조이)'하는 서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뿐, 그 뿌리는 결국 '존재의 불안'이라는 동일한 토양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정함이 이긴다, 혼란 속에서 피어나는 수용의 힘

영화의 클라이맥스, 에블린은 마침내 깨닫습니다. 수많은 우주에서 화려하게 성공한 자신이 되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요. 그녀가 선택한 무기는 강력한 쿵푸도, 초능력도 아닌 남편 웨이먼드가 그토록 강조했던 '다정함'이었습니다. 에블린은 자신을 죽이려 달려드는 적들에게 주먹을 날리는 대신, 그들이 마음속 깊이 결핍하고 있던 것을 채워주는 방식을 택합니다. 그리고 멸망(베이글)으로 걸어 들어가는 딸 조이를 억지로 끌어내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끌어안습니다.

 

이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수용 전념 치료'의 핵심과 일맥상통합니다. 고통이나 혼란을 없애려고 통제하려 들수록 심리적 고통은 커집니다. 진정한 회복은 부정적인 감정과 상황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 삶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수용'에서 시작됩니다. 에블린은 "너는 뚱뚱하고 멍청해"라고 말하는 딸의 비난조차, 그리고 이 엉망진창인 세금 문제와 세탁소의 현실조차 자신의 삶으로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이마에 '제3의 눈(Googly Eyes)'을 붙인 에블린의 모습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고 혼란스럽지만, 그 안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눈을 맞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와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하는 것. 영화가 제시하는 구원은 거창한 성공이 아니라, 불완전한 서로를 껴안는 따뜻한 포옹입니다. 혼란을 잠재우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관계이며, 무의미한 우주를 버티게 하는 힘은 아주 사소한 다정함이라는 메시지는 그 어떤 심리학 이론보다 강력한 울림을 줍니다.

 

마치며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멀티버스라는 거대한 우주를 여행하고 돌아와, 결국 냄새나는 세탁소 한구석의 일상을 비춥니다. 하지만 그 일상은 여행을 떠나기 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느껴집니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지금 당신이 느끼는 혼란과 후회, "망한 이번 생"이라는 자조 섞인 생각까지도 모두 당신이라는 우주를 구성하는 소중한 파편이라고 말이죠. 에블린이 그랬듯,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나은 나로 변신하는 초능력이 아니라, 부족한 나 자신과 타인을 다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용기일지도 모릅니다.

 

혹시 지금 삶이 너무 시끄럽고 복잡하게 느껴지시나요? 그렇다면 이 영화를 다시 한번 감상해 보세요. 화려한 액션 너머, 지친 당신의 어깨를 조용히 감싸 안는 위로의 손길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너는 너라서 충분해"라는 그 따뜻한 속삭임을 말입니다.